사진. 이수형
당시삼백수 정선 39. 登岳陽樓 악양루에 올라
杜甫 두보.
예전부터 동정호(洞庭湖)를 들어왔는데
오늘에야 (동정호 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에 올랐네.
오(吳)나라 초(楚)나라는 동쪽과 남쪽으로 펼쳐져 있고
해와 달은 밤낮으로 호수위로 뜨고 지네.
친한 벗은 일자 소식도 없고
늙고 병든 몸만 외로운 배에 남았다.
관산(關山) 북녘엔 전쟁이 한창이라
난간에 기대니 눈물만 하염없이 흐르네.
昔聞洞庭水, 今上岳陽樓.
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
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戎馬關山北, 憑軒涕泗流.
이 시는 대력(大曆) 3년(768) 겨울, 두보가 삼협(三峽)을 나와 호북성의 강릉(江陵)․공안(公安)으로부터 호남성의 악양(岳陽)까지 유람하다가 악양루에 올라 고향을 바라보며 감회를 시로 지은 것이다. ‘선경후정(先景後情)’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
❖岳陽樓(악양루): 지금의 호남성 악양현(岳陽縣) 서문의 성루. 굽어 동정호를 내려 보면 안개 낀 파도에 경치가 광활하다. 중국의 삼대 명루(名樓)로는 남창(南昌)의 등왕각(縢王閣), 무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 악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를 꼽는다. 필자는 10여년전 황학루를 탐방하였고, 2009년 가을 등왕각을 탐방하였는데, 둘 다 강을 끼고 있어 풍치가 아름답다.
❖洞庭(동정): 호수이름. 호남성 북부에 있는 중국에서 제일 큰 호수. 호안(湖岸)에 악양루가 있고, 그 부근에 소상팔경(瀟湘八景)이 있다.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오(吳) 땅과 초(楚) 땅은 동정호에 의해 나누어진다. 오(吳)는 호수의 동쪽으로 지금의 강소성, 절강성 일대, 초(楚)는 호수의 남쪽으로 지금의 호남성, 호북성, 강서성 일대. 坼(탁): 터지다. 경계를 나누다.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호수 위에는 또 하나의 천지가 이루어져 해와 달이 그 가운데서 뜨고 지는 듯하다. 천지의 운행이 쉼이 없다. 수경(水經), 상수주(湘水注)에 “동정호는 넓어 둘레가 500여 리, 해와 달이 그 가운데서 뜨고 지는 것 같다”고 했다. 건곤(乾坤): 하늘과 땅. 건(乾)은 양이고 곤(坤)은 음으로, 해와 달을 의미하기도 한다.
❖老病有孤舟: 당시 두보는 57세로 질병이 많아 귀도 어둡고 팔도 마비되었다. 촉(蜀)을 떠나온 후 전가족이 강물위에서 표박(漂泊)하고 있었다.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오랑캐 말이 관산 북녘에 있다. 중원에서는 여전히 전쟁을 하고 있다. 戎馬(융마): 전쟁 말. 오랑캐 말.
❖關山(관산): 변경 요새의 산악.
❖憑軒(빙헌): 난간에 기대어.
❖涕泗(체사): 눈물과 콧물.
저자.
두보(杜甫): 712-770
자는 자미(子美)이고, 원적(原籍)은 양양(襄陽: 지금의 호북성 襄樊)이다. 그의 13세조(世祖)는 두예(杜預)로서, 경조 두릉(京兆杜陵: 지금의 섬서성 長安縣 동북) 사람이다. 그러므로 두보는 자칭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했다. 증조부는 공현(鞏縣: 지금의 하남성 鞏義)로 이사를 갔다. 두보는 일찍이 장안성 남쪽 소릉(少陵) 부근에 거주한 적이 있다. 그래서 또 자칭 “소릉야로(少陵野老)”라고 하여, “두소릉(杜少陵)”이라고 불렸다. 후에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맡은 적이 있어, 후세에 “두공부(杜工部)”라고 칭해졌다. 두보는 중국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시성(詩聖)”이라고 불리었다. 그의 시는 당시의 정치․군사․사회의 상황을 전면적으로 반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시사(詩史)”라고 했다. 후인들은 그와 이백(李白)을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했다.
역주.
조규백(曹圭百) (sudongpo@hanmail.net)
號, 己百.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중문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國立臺灣大學 중문과 訪問學人, 중국 復旦大學 중문과 박사후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 중국 四川大學 古籍硏究所 硏究學者, 중국 南京大學 중문과 硏究學者를 역임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에서 중국고전을 배웠으며, 이어서 한학자 故 硏靑 吳虎泳 老師께 漢學을 사사하였다. 성균관대, 제주대, 제주산업정보대학의 강사와 제주관광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 숭실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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