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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

당시삼백수 정선 58. 黃鶴樓 황학루 崔顥 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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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수형

당시삼백수 정선 58. 黃鶴樓  황학루 

崔顥 최호


옛 신선 이미 황학(黃鶴)을 타고 날아 가버리고

이 땅에는 황학루만 덩그라니 남아있네.

황학은 한 번 떠나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흰 구름만 천년 동안 유유히 떠가네.


쾌청한 날 강물 저쪽엔 한양(漢陽)의 나무들 뚜렷하고

향기로운 풀들은 앵무주(鸚鵡洲)에 무성하구나.

해는 저무는데 나의 고향은 어드멘가

강가의 안개가 날 시름겹게 하네.


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

日暮鄕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



황학루에서 본 경치와 그로 인해 생긴 향수를 묘사하였는데, 절창(絶唱)으로 일컬어진다.

❖黃鶴樓(황학루): 누각이름. 지금의 호북성 무한(武漢) 황학산(黃鶴山) 서북 황학기(黃鶴磯) 위에 장강을 면하여 서있다. 전설에 신선 왕자안(王子安)이 이곳에서 황학(黃鶴)을 타고서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고 하여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선인(仙山) 비문위(費文褘)가 황학을 타고 등선(登仙)하였는데, 일찍이 여기서 쉬었다는 설도 있다.

❖昔人(석인): 옛사람. 전설 가운데의 선인(仙人).

❖歷歷(역력): 분명한 모양.

❖漢陽(한양): 호북성 무한시(武漢市) 한양(漢陽). 황학루가 있는 무창(武昌)과 장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무한시의 한 구역.

❖萋萋(처처): 풀이 무성한 모양.

❖鸚鵡洲(앵무주): 장강(長江) 가운데의 작은 사주(沙洲)로, 무한시 서남 장강 가운데 있는데, 동한(東漢)의 니형(禰衡)이 일찍이 「황학부(黃鶴賦)」를 지어서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훗날 니형은 황조(黃祖)에게 죽임을 당했다.

❖鄕關(향관): 고향의 관문, 고향을 가리킨다.

❖煙波(연파): 안개와 파도.



愚案: 필자는 십여 년 전쯤 중국 호북성 무한(武漢)의 황학루를 유람하였다. 장강(長江: 양자강)가에 우뚝 솟아 오른 누각이다. 황학루는 악양루(岳陽樓), 등왕각(縢王閣)과 함께 중국의 삼대누각으로 손꼽히고 있다. 5층 누각치고는 높고 커서 차라리 고층 빌딩을 연상케도 하는 규모이다. 위로 올라가니 장강과 장강대교, 무한시의 경관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여기가 옛 시에 나타난 황학루라니. 아니 옛날 ‘황학루’는 사라지고 시대마다 한 층, 한 층 새롭고 높게 개축되어 지금의 규모에 이르렀다고 한다. 처마의 모양은 황학이 날아갈 듯 하늘로 날개를 펼친 모습이다. 청대의 건축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1-2구: 황학루의 전설과 현존을 언급하고 있다. 전설에 “선인(仙人) 왕자안(王子安)이 황학을 타고서 여기를 지나갔다”고도 하고, “비문위(費文褘)가 등선(登仙)하면서 황학을 몰아 여기서 쉬었다”고도 한다. 그만큼 전망이 좋기 때문에 이러한 전설이 생겼으리라. 그래도 황학루는 무창(武昌: 현재의 무한시)땅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3-4구: 황학은 한 번 떠난 뒤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일거불부반(一去不復返)!” 우리네 인생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더욱 순간순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 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흰 구름만은 천년토록 변함없이 유유히 떠 있다. 그러나 기실 그 흰 구름도 동일한 구름이 아니라 순간순간 변화되는 다른 구름인 것을.

5-6구: 청명한 날씨 맑은 강물에 강 건너편 한양(漢陽) 땅의 나무가 뚜렷하게 보이고, 향기로운 풀이 장강 삼각주인 앵무주(鸚鵡洲)에 우거져 있다. 주위의 자연경관을 그리고 있다.

7-8구: 해 저무니 향수가 몰아닥치고, 안개 덮인 강가엔 수심만 자욱이 내려앉는다. 여기서 인간의 근원지 고향에 대한 지향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해 저무는 시점으로 변하는 시간의 추이가 느껴진다.

이 시는 신필(神筆)로 일컬어지고 있고 기세도 좋고 자연스럽다. 더 좋게 만들 수가 없다. 실제로 읽어보면 중국어발음으로나 한국 한자발음 어느 쪽으로 읽어도 음조(音調)가 자연스러워 여러 번 읽어도 물리지 않는다.

전해오는 말에, 중국 최고수준의 시인 이백(李白)도 무창(武昌)에 노닐면서 황학루에 올라 시를 지으려 하다가, 최호의 이 시를 보고는, “눈앞에 경치는 있지만 시어를 못 얻었는데, 최호의 제시(題詩)가 위에 있구나.”라고 탄식하고는, 붓을 던졌다고 한다. 이백은 후에 금릉(金陵)의 봉황대(鳳凰臺)에 이르러 이 시와 비견되는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시를 지었다고 한다.    



작가.

최호(崔顥): 대략 704-754 

변주(汴州: 지금의 하남성 開封) 사람이다.


역주.

조규백(曹圭百) (sudongpo@hanmail.net)

號, 己百.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중문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國立臺灣大學 중문과 訪問學人, 중국 復旦大學 중문과 박사후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 중국 四川大學 古籍硏究所 硏究學者, 중국 南京大學 중문과 硏究學者를 역임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에서 중국고전을 배웠으며, 이어서 한학자 故 硏靑 吳虎泳 老師께 漢學을 사사하였다. 성균관대, 제주대, 제주산업정보대학의 강사와 제주관광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 숭실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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