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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

당시삼백수 정선 61. 蜀相 촉나라의 승상 제갈공명 杜甫 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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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수형

당시삼백수 정선 61. 蜀相  촉나라의 승상 제갈공명 

杜甫 두보


승상의 사당을 어디서 찾을까?

금관성(錦官城) 밖 잣나무 무성한 곳이로다.

계단에 비치는 푸른 풀은 저절로 봄빛이요

나뭇잎 사이 꾀꼬리는 공연히 예쁜 소리로 지저귄다.


세 번이나 초려(草廬)를 번거롭게 찾아감은 천하를 위한 계책이요

두 대에 걸쳐 왕업을 열고 계승한 것은 (충성스런) 늙은 신하의 마음이라.

군사를 내었으되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죽고 말았으니

길이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이 소매를 젖게 하누나.


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柏森森.

映階碧草自春色,  隔葉黃鸝空好音.

三顧頻煩天下計,  兩朝開濟老臣心.

出師未捷身先死,  長使英雄淚滿襟.


이 시는 두보(杜甫)가 상원(上元) 원년(760) 초에 성도(成都)에서 무후사(武侯祠)를 유람할 때 지었다. 먼저 경치를 그리고, 이어서 촉나라 승상 제갈공명에 대해 추모하고 있다.

❖蜀相(촉상): 제갈량(諸葛亮: 字는 孔明)을 가리킨다. 유비(劉備)는 촉(蜀)에서 즉위한 이후, 제갈량을 승상으로 삼았다.

❖丞相祠堂(승상사당): 무후사(武侯祠). 제갈공명의 사당. 그 곁에 유비(劉備)의 묘가 있다. 성도에 있다. 역자는 2003년, 무후사를 탐방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무후사가 있고 유비의 그 묘는 그 구석에 있어 느낌이 각별했다.  

❖錦官城(금관성): 사천성 성도(成都)의 별칭. 옛날에 성도는 비단의 산지로 저명하여, 전문관리를 두어 관리하였으므로 이름 지음.

❖森森(삼삼): 무성한 모양. 빽빽하다.

❖三顧(삼고): 제갈량이 양양(襄陽)의 융중(隆中)에 은거하던 때, 유비가 세 번 찾아가 그를 나오게 했다. 三顧草廬. 顧(고): 방문하다.

❖頻煩: 누차 번거롭게. 여러 번 수고를 끼치다.  

❖兩朝(양조): 촉한(蜀漢)의 유비(劉備)와 유선(劉禪) 두 조정.

❖開濟(개제): 제갈량이 유비를 보좌하여 개국한 것과 유선을 도와 위업을 계승한 것.

❖出師(출사): 군사를 내어 위(魏)를 정벌하다. 건흥(建興) 12년(234), 제갈량은 군사를 일으켜 위(魏)를 정벌하였는데, 사곡(斜谷)을 나와 오장원(五丈原)에 의거하여, 위의 사마의(司馬懿)와 백 여 일이나 맞섰다. 제갈량은 8월에 군중(軍中)에서 병사(病死)하였다. 향년 54세.



작가

두보(杜甫): 712-770 

자는 자미(子美)이고, 원적(原籍)은 양양(襄陽: 지금의 호북성 襄樊)이다. 그의 13세조(世祖)는 두예(杜預)로서, 경조 두릉(京兆杜陵: 지금의 섬서성 長安縣 동북) 사람이다. 그러므로 두보는 자칭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했다. 증조부는 공현(鞏縣: 지금의 하남성 鞏義)로 이사를 갔다. 두보는 일찍이 장안성 남쪽 소릉(少陵) 부근에 거주한 적이 있다. 그래서 또 자칭 “소릉야로(少陵野老)”라고 하여, “두소릉(杜少陵)”이라고 불렸다. 후에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맡은 적이 있어, 후세에 “두공부(杜工部)”라고 칭해졌다. 두보는 중국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시성(詩聖)”이라고 불리었다. 그의 시는 당시의 정치․군사․사회의 상황을 전면적으로 반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시사(詩史)”라고 했다. 후인들은 그와 이백(李白)을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했다.

역주

조규백(曹圭百) (sudongpo@hanmail.net)

號, 己百.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중문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國立臺灣大學 중문과 訪問學人, 중국 復旦大學 중문과 박사후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 중국 四川大學 古籍硏究所 硏究學者, 중국 南京大學 중문과 硏究學者를 역임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에서 중국고전을 배웠으며, 이어서 한학자 故 硏靑 吳虎泳 老師께 漢學을 사사하였다. 성균관대, 제주대, 제주산업정보대학의 강사와 제주관광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 숭실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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