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당시삼백수

당시삼백수 정선 59. 登金陵鳳凰臺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 ̗ 李白 이백

728x90
반응형
SMALL

사진 이수형

당시삼백수 정선 59. 登金陵鳳凰臺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 ̗ 

李白 이백


봉황대 위에 봉황새 노닐더니

봉황새는 떠나가고 빈 누대 곁엔 강물만 저절로 흐른다.

오나라 궁전의 화초는 황폐한 길가에 묻혀지고

진대(晉代)의 귀족들은 옛 무덤을 이루었다.


세 봉우리는 윗부분만 절반쯤 푸른 하늘 밖에 우뚝 섰고

두 강물은 백로주(白鷺洲)로 나뉘었다.

모두 뜬 구름이 밝은 해를 가리기 때문이니

장안(長安)이 보이지 않아 나그네로 하여금 근심을 일게 한다.  


鳳凰臺上鳳凰遊,  鳳去臺空江自流.

吳宮花草埋幽徑,  晉代衣冠成古丘.

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

總爲浮雲能蔽日,  長安不見使人愁.



이 시는 회고를 빌어 경치를 묘사함에 작자의 독특한 감상을 써내고 있다. 천보(天寶) 6年(747) 이백이 長安에서 쫓겨나 강남을 유람할 때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 지은 시이다.

❖金陵(금릉): 지금의 강소성 남경시(南京市). 남경은 서안(西安), 낙양(洛陽), 개봉(開封), 북경(北京), 항주(杭州)와 더불어 중국의 6대 고도(古都)의 하나이다.

❖鳳凰臺(봉황대): 옛터가 지금의 남경시 봉대산(鳳臺山)에 있다. 전해오길, 남조(南朝) 유송(劉宋) 시대의 원가(元嘉) 연간에 세 마리의 봉황이 산에 모였는데, 이로 인해 봉황대(鳳凰臺)를 짓고, 산도 이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吳宮(오궁): 삼국시대 오(吳)나라가 금릉(金陵)에 도읍을 세웠다.

❖晉代(진대): 서진(西晉)의 뒤를 이어, 동진(東晉)은 남도(南渡) 후에 금릉에 도읍을 세웠다.

❖衣冠(의관): 명문망족(名門望族). 명문귀족. 고관. 의관을 갖춘 사람. 곧 관리나 귀인(貴人). 士大夫의 의관은 禮制로 규정한다.

❖古丘(고구): 고묘(古墓), 분묘(墳墓)가 있는 언덕.

❖三山(삼산): 금릉 서남 장강에 임한 세 산 봉우리.  

❖半落(반락): 반쯤 떨어지다. 반쯤 솟아있다. 세 개의 산봉우리는 그 형상이 높고 멀리 있어, 산 아래편은 안개가 자욱하여 보이지 않고 윗부분만 보인다. 산의 모습이 아래 절반은 보이지 않고 위의 절반만 보이는 상황.

❖二水(이수): 진회하(秦淮河)가 금릉성(金陵城)을 뚫고 지나며 장강으로 들어가는데, 강 가운데 백로주가 있어 강물을 둘로 나눈다.  

❖白鷺洲(백로주): 장강 가운데의 사주(沙洲)로, 백로가 많이 모였기에 이름을 얻었다.

❖總爲(총위): 모두 ...... 때문이다.

❖浮雲蔽日(부운폐일): 뜬 구름이 해를 가리다. 간사한 사람이 현량(賢良)한 사람을 가림.



작가.

이백(李白): 701-762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조적(祖籍)은 농서 성기(隴西成紀: 지금의 감숙성 秦安)이며, 중아시아 쇄엽성(碎葉城)에서 태어났다. 이백은 천재적인 시인이다. 두보는 그를 칭찬하여 “이백은 시가 무적이라, 표연하여 그 생각 무리들과 다르다(白也詩無敵, 飄然思不群)”(「春日憶李白」), “붓을 들면 비바람을 놀래게 하고, 시가 이루어지면 귀신을 흐느끼게 한다(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寄李白」)라 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은 일찍이 이백 자신의 시구를 사용하여 이백의 시를 “맑은 물에서 연꽃이 나온 듯하여, 천연스러워 수식을 하지 않는다(淸水出芙蓉, 天然去雕飾)”라 평하였다.

역주.

조규백(曹圭百) (sudongpo@hanmail.net)

號, 己百.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중문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國立臺灣大學 중문과 訪問學人, 중국 復旦大學 중문과 박사후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 중국 四川大學 古籍硏究所 硏究學者, 중국 南京大學 중문과 硏究學者를 역임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에서 중국고전을 배웠으며, 이어서 한학자 故 硏靑 吳虎泳 老師께 漢學을 사사하였다. 성균관대, 제주대, 제주산업정보대학의 강사와 제주관광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 숭실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