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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

당시삼백수 정선 24. 宣州謝朓樓餞別校書叔雲 선주(宣州) 사조루(謝朓樓)에서 교서랑 이운(李雲) 숙부를 전별하며 李白 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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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수형

24. 宣州謝朓樓餞別校書叔雲

선주(宣州) 사조루(謝朓樓)에서 교서랑 이운(李雲) 부를 전별하며

李白 이백

 

날 버리고 가는

어제의 세월 머물게 할 수 없고

내 마음 어지럽히는

오늘의 나날은 번뇌도 많아라.

 

긴 바람이 만 리 길 가는, 가을 기러기떼 보내니

이를 보며 높은 누각에서 술에 취해볼 만도 하구나.

그대의 봉래(蓬萊)의 문장은 건안(建安)의 풍골(風骨)을 갖추었고

나 또한 그 사이에 사조(謝朓)같이 청신하고 수려하다.

 

우리 둘 다 빼어난 흥취 품고 웅대한 생각이 하늘을 날아

푸른 하늘 날아올라 해와 달을 따려 했지.

칼을 빼어 물을 잘라도 물은 다시 흐르고

술잔을 들어 근심을 녹여도 근심은 더욱 깊어지네.

 

세상을 살아갈 제 내 뜻대로 되지 않거니

내일 아침 머리 풀어 헤치고 조각배를 타고 떠나려네.

 

棄我去者, 昨日之日不可留.

亂我心者, 今日之日多煩憂.

長風萬里送秋雁, 對此可以酣高樓.

蓬萊文章建安骨, 中間小謝又淸發.

俱懷逸興壯思飛, 欲上靑天覽明月.

抽刀斷水水更流, 擧杯銷愁愁更愁.

人生在世不稱意, 明朝散髮弄扁舟.

 

이 시는 천보(天寶) 말년, 이백이 선주(宣州)에서 족숙(族叔) 이운(李雲)을 전별할 때 지은 것이다. 봉래(蓬萊)의 문장으로써 이운을 비유하고, 청신하고 수려한 풍격의 사조(謝朓)에다가 자신을 비유하면서, 뜻에 맞지 않는 고민을 풀고 있다. “칼을 빼어 물을 잘라도 물은 다시 흐르고, 술잔을 들어 근심을 녹여도 근심은 더욱 깊어지네는 탁월한 표현이다.

 

宣州(선주): 지금의 안휘성 선성현(宣城縣).

謝朓(사조): ()는 현휘(玄暉), 양하(陽夏: 지금의 하남성 太康) 사람. 남북조시대 제()의 시인.

謝朓樓(사조루): 사조(謝朓)가 선주태수(宣州太守)로 있을 때 지었다. 북루(北樓) 라고도 한다. 당말(唐末)에 첩장루(疊嶂樓)로 개명하였다.

餞別(전별): 전별하다. 송별연을 베풀다. 떠나는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

校書叔雲(교서숙운): 이백(李白)의 족숙(族叔)으로 이름은 이운(李雲)이다. 일찍이 궁중 소장 도서를 정리교감하는 일을 했던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郞)을 역임했다.

(): 술 즐길 감. 한창 감. 주흥이 고조됨.

蓬萊(봉래): 󰡔후한서(後漢書)󰡕, 두장전(竇章傳)의 기록에 의하면, 동한(東漢)의 학자는 조정의 장서루(藏書樓) 동관(東觀)봉래산(蓬萊山)”이라 칭했다. 이 때문에 바다의 신선산 봉래(蓬萊)숨겨진 서적[幽經秘籍]”이 있다고 전한다. 여기서는 이운이 있는 비서성(秘書省)을 가리킨다.

蓬萊文章(봉래문장): 이운(李雲)의 문장을 가리킨다. 이운이 재직하고 있는 비서성 교서랑은 전문적으로 도서를 교정(校訂)하였기 때문에 봉래(蓬萊)로써 비유한다.
봉래는 바다의 신선(仙山)이 사는 산이다. 동한(東漢)때 관가(官家)의 저술과 조정의 장서를 동관(東觀)에 두고 老氏(老子) 藏室이라고 하였다. 경적이 많았고 유경비령(幽經秘靈)을 소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운이 재직한 비서성은 東觀에 해당한다.

建安骨(건안골): 건안풍골(建安風骨). 한말(漢末) 건안(建安)연간에 조조부자(曹操父子)와 건안칠자(建安七子)가 지은 시문(詩文)은 굳세고 강건하여, “건안풍골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이운의 문장을 칭찬한 것이다.

小謝(소사): 사조(謝朓). 후대 사람은 그와 사령운(謝靈運)을 병칭하여, 사령운을 대사(大謝)”라고 하고, 사조(謝朓)소사(小謝)”라고 하였다.

淸發(청발): 청신(淸新)하고 빼어났다.

中間小謝又淸發(중간소사우청발): 이 구에서 이백은 자신을 소사(小謝)에게 비유하고 있다.

逸興(일흥): 뛰어난 흥취.

(): “()”과 통한다. 잡다. 따다.

明月(명월): 어떤 판본에는 일월(日月)”이라 했다.

不稱意(불칭의): 뜻에 맞지 않다.

散髮(산발): 옛사람은 평상시에 속발하고 관()을 쓰며, 한가할 때 머리를 푼다. 후에 벼슬의 구속을 받지 않음을 뜻하여, 관직을 버리고 귀은(歸隱)한다는 의미로 인신(引伸)되었다.

扁舟(편주): 작은 배. 조각배.

 

이백(李白): 701-762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조적(祖籍)은 농서 성기(隴西成紀: 지금의 감숙성 秦安)이며, 중아시아 쇄엽성(碎葉城)에서 태어났다. 이백은 천재적인 시인이다. 두보는 그를 칭찬하여 이백은 시가 무적이라, 표연하여 그 생각 무리들과 다르다(白也詩無敵, 飄然思不群)”(春日憶李白), “붓을 들면 비바람을 놀래게 하고, 시가 이루어지면 귀신을 흐느끼게 한다(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寄李白)라 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은 일찍이 이백 자신의 시구를 사용하여 이백의 시를 맑은 물에서 연꽃이 나온 듯하여, 천연스러워 수식을 하지 않는다(淸水出芙蓉, 天然去雕飾)”라 평하였다.

 

조규백(曹圭百) (sudongpo@hanmail.net)

, 己百.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중문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國立臺灣大學 중문과 訪問學人, 중국 復旦大學 중문과 박사후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 중국 四川大學 古籍硏究所 硏究學者, 중국 南京大學 중문과 硏究學者를 역임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에서 중국고전을 배웠으며, 이어서 한학자 故 硏靑 吳虎泳 老師漢學을 사사하였다. 성균관대, 제주대, 제주산업정보대학의 강사와 제주관광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 숭실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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