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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소동파 사선 蘇東坡詞選 浣溪沙 흰 머리칼 새로 난 것 어쩔 수 없어 옛 청산에 돌아감만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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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수형

3. 浣溪沙

옛날을 생각하며

서막(徐邈)은 성인(청주)에도 현인(탁주)에도 취할 수 있었고
유령(劉令)은 땅을 자리 삼고 푸른 하늘을 장막으로 삼았네.
반악(潘岳)의 백옥 같은 얼굴 누가 가까이 하나.

흰 머리칼 새로 난 것 어쩔 수 없어
옛 청산에 돌아감만 못하리.
한스러운 것은 산(山)을 살 돈 빌릴 이 없음이라.

感舊

徐邈能中酒聖賢.
劉伶席地幕靑天.
潘郎白璧爲誰連.

無可奈何新白髮, 不如歸去舊靑山.
恨無人借買山錢.

[주석]
. 徐邈(서막): 󰡔三國志魏書󰡕, 권 27, <徐邈傳>, “서막은 字가 景山으로 燕國의 계인(薊人)이다. 魏나라가 처음 건립되자 尙書郞이 되었다. 당시에는 법으로 술을 금지하였다. 서막은 사적으로 술을 마셔 깊이 취함에 이르렀다. 校事 趙達이 曹操에 대해 물었다. 서막은 ‘중간 정도의 성인(中聖人)’이라고 대답하였다. 조달이 太祖(曹操)에게 아뢰니, 태조가 심히 노했다. 度遼將軍 鮮于輔가, ‘평소에 취객이 말하길, 술이 맑은 것은 성인이고, 탁한 것은 현인이라 합니다. 서막은 성품이 신중한데, 우연히 醉言을 한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결국 형벌을 면하였다. 

후에 (서막은) 隴西太守가 되었고, 南安太守로 전임하였다. 文帝가 등극하자 譙相 中郞將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車駕가 許昌을 행차할 때, 서막에게 묻기를, ‘자못 다시 성인에 취하였는가(頗復中聖人不)?’라고 물었다. 서막이 대답하길, ‘옛날 子反이 穀陽에서 쓰러졌는데, 御叔은 飮酒로 벌을 주었습니다. 臣은 기호가 그 두 사람과 같습니다. 스스로 징계할 수 없습니다. 그때 다시 술에 취하였다. 그러나 혹이 나서 그 모습이 추함으로 알려졌습니다. 臣은 술에 취함으로 유명합니다.’ 황제가 크게 웃으며 좌우를 돌아보고 말했다. ‘이름이 헛되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로구나’라고 하였다.”
. 聖: 聖人. 여기서는 청주를 말한다.
. 賢: 賢人. 여기서는 탁주를 말한다.
. 劉伶席地幕靑天:
劉伶: 字는 伯倫. 沛國人. 西晉의 사상가. 죽림칠현의 한 사람. 莊子사상을 실천하여, 만물을 齊同하다고 보고, 신체를 土木으로 간주하며, 意慾의 자유를 추구하였다. 술을 즐겼으며, 저작에 <酒德頌>이 있다.
그는 용모가 심히 추악하고 초췌하였으나 志氣가 호방하여 우주를 좁게 여겼다.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항상 술병을 차고 스스로 따르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삽을 메고 따라오게 하고 이르기를, “죽으면 곧 그 자리에 나를 묻어 달라”라고 하였다. 그의 <酒德頌>에, “다님에 일정한 수레바퀴 자국이 없고 거처함에 일정한 집이 없으며, 하늘을 장막으로 삼고 땅을 자리로 삼아서 마음 가는 대로 한다(行無轍跡, 居無室廬, 幕天席地, 縱意所如)”고 하였다.
. 潘郎白璧爲誰連:
潘郎: 西晉의 문인 반악(潘岳)을 가리킨다. 유려한 시문을 썼으며 亡妻를 애도한 <悼亡詩>는 유명하다. 또 미남이었으므로 미남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247-300년.
반악의 投橘: 반악은 용모가 아름다워 젊었을 때, 활을 옆에 끼고 洛陽 길에 나타나기만 하면, 여자들이 몰려와 그를 향해 과일을 던졌다는 고사.
白璧: 白玉이다.
하후담(夏侯湛)은 새로운 글을 잘 지었고, 용모가 아름다웠다. 반악과 친하여 매양 거취를 같이 하여, 당시 京都에서는 그들을 ‘連璧’이라고 하였다.
. 이상 3구의 의미: 동파 자신의 술 마시는 자질과 경력은 감히 酒聖이나 酒狂에 비견할 수 없고, 친구 가운데에서도 누가 徐邈이나 劉伶, 潘岳, 夏侯湛 등과 병칭 할 수 있겠는가?
. 舊靑山: 고향의 산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歸隱의 의미가 있다.
. 恨無人借買山錢: 이는 산을 사서 歸隱하고 싶지만, 치초(郗超)와 같은 돈을 대어줄 벗이 없다는 의미이다. 언외의 뜻은 歸隱하고 싶지만 이룰 수 없으니 그 고충을 상상할 만하다.
㰡︖說新語㰡↓ 下卷, 上, <樓逸>: “郗超는 매번 고상한 뜻을 지니고 은거하려는 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백만의 자금을 마련해 주고 그를 위해 거처까지 지어주었다. 섬현(剡縣)에서 戴公(戴逵: 대규)을 위해 집을 지어주었는데 매우 정교하고 깔끔했다. 대공은 처음 그 집으로 갔을 때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근자에 섬현의 집에 왔는데 마치 관사에 들어간 것 같네’라고 했다. 치초는 부약(傅約)을 위해서도 백만의 자금을 마련했지만, 부약이 은거하려는 일이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그에게 주지 못하고 말았다.”

[창작 시기] 37세(熙寧5년, 壬子, 1072) 가을에 항주에서 지었다.

* 저자소개: 蘇東坡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본명이 소식(蘇軾)이며, 부친 소순(蘇洵), 아우 소철(蘇轍)과 더불어 “삼소(三蘇)”라 불린다. 그는 중국 북송시대의 정치가, 예술가로서도 유명하지만, 천재적 자유정신과 재주, 꾸준한 노력,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는 정신으로 훌륭한 문학작품을 창작해낸 대문호로서 더욱 알려졌다.

자유정신과 이성적 사유, 그리고 개성을 중시했던 북송의 문화와 문학정신, 시대정신이 그에게 역력히 구현되어 있다. 문학의 경우, 그는 시, 사(詞), 산문, 부(賦) 등 여러 장르에 모두 뛰어나 각기 시대의 최고봉이다.

 

또한 그는 경학(經學)․고고학․음식 만들기․술의 제조․차(茶)의 품평․서예․그림, 그리고 예술 감식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 역주자 소개

 曹圭百

 韓國外國語大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成均館大 중어중문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臺灣大學 중문과 訪問學人, 중국 復旦大學 중문과 박사 후 연구원(한국 학술진흥재단 지원), 중국 四川大學 古籍硏究所 硏究學者를 역임했다. 그리고 民族文化推進會 국역연수원을 졸업했으며, 성균관대, 제주대, 제주산업정보대, 제주교대 강사를 역임했다.

現在 濟州觀光大學 중국어통역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구실적으로는 中國의 文豪 蘇東坡(역주), 소동파 산문선(역주), 제주관광중국어 회화(상, 하), 史記世家(下)(공역), 千字文註解(前) - 아들을 위한 천자문 등의 역저서와, <詩經․鄭風 愛情詩 小考>, <蘇軾詩硏究>, <出仕와 隱退間의 갈등과 그 解消 - 蘇軾詩의 한 斷面>, <陶淵明에의 同一化樣相과 陶詩의 創造的 受容 - 蘇軾詩의 한 斷面>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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