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수형
3. 望嶽
태산을 바라보며
杜甫
태산(泰山)은 그 모습이 어떠한가?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에 걸쳐 푸르름이 끝없이 이어졌구나.
조물주는 신령스런 기운을 여기에 다 모았고
(산의) 북쪽과 남쪽은 어두움과 밝음을 갈랐다.
가슴을 활짝 여니 층층 구름 일어나고
눈시울을 크게 뜨니 돌아가는 새들 눈에 들어온다.
언젠가 반드시 저 정상에 올라서
뭇 산들이 작음을 한 번 굽어보리라.
岱宗夫如何, 齊魯靑未了.
造化鍾神秀, 陰陽割昏曉.
盪胸生曾雲, 決眥入歸鳥.
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
주석
태산을 바라보며 정상에 올라가고픈 마음이 생겨나는 청년 두보의 씩씩한 뜻과 기백과 포부를 표현하고 있다. 태산을 올라가지 못하고 멀리 바라보며 지은 시이다. 언젠가는 태산의 정상에 올라 그 아래 작은 산들을 굽어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嶽(악): 여기서는 동악(東嶽) 태산(泰山)을 가리킨다. 이 시는 개원(開元) 24년(736), 두보가 제(齊)․조(趙) 지방을 유람할 때 지었다. 중국의 태산은 해발 1520여m로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의 백두산, 한라산에 해당하는 중국의 상징적인 산이다. 중국의 역대 여러 임금이 봉선(封禪)의식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다. 이는 두보가 멀리서 태산을 바라보며 지은 시이다. 역자가 2006년 현장을 탐방해 보니, 태산에서 장대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정상 주변의 인공 건축물은 없느니만 못한 것 같다.
❖岱宗(대종): 동악 태산의 별칭으로, 오악(五嶽)의 으뜸이므로 대종(岱宗)이라 부른다.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있다. 岱(대): 대산 대. 태산의 별칭. 宗(종): 마루. 산마루. 가장 높은 곳.
❖齊魯(제로): 제(齊)나라와 노(魯)나라, 춘추시대의 두 나라이름. 태산의 남쪽은 노나라이고, 태산의 북쪽은 제나라이다. 후에 산동성 일대를 제로(齊魯)라고 칭하였다.
❖未了(미료): 마치지 아니하다. 무궁무진.
❖造化(조화): 대자연. 자연조화. 자연계의 주재자. 조물주.
❖鍾(종): 모을 종.
❖造化鍾神秀(조화종신수): 대자연은 신기(神奇)함과 수려함을 모두 태산에 집중하게 했다는 의미이다.
당시삼백수 정선 두보, 태산을 바라보며 동영상.
❖陰陽割昏曉(음양할혼효): 음지와 양지는 어두움과 밝음을 갈랐다. 태산은 아주 높고 커서 햇빛이 비치는 곳은 양지가 되고, 햇빛이 비치지 못하는 곳은 음지가 된다.
❖盪(탕): 씻을 탕. = 蕩.
❖曾: “층(層)”과 통한다.
❖決(결): 터질 결.
❖眥(제): 눈초리 제. 흘길 자.
❖決眥(결제): 눈시울을 크게 뜨고.
❖會當(회당): =會須. 반드시 ......해야 한다. 會(회): 모름지기. 반드시.
❖凌(릉): 오르다.
❖絶頂(절정): 최고봉.
❖一覽衆山小(일람중산소): 맹자(孟子), 「盡心上」, “공자는 동산에 올라서는 노나라가 작다고 여기었고, 태산을 올라서는 천하를 작다고 여겼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
작가.
두보(杜甫): 712-770
자는 자미(子美)이고, 원적(原籍)은 양양(襄陽: 지금의 호북성 襄樊)이다. 그의 13세조(世祖)는 두예(杜預)로서, 경조 두릉(京兆杜陵: 지금의 섬서성 長安縣 동북) 사람이다. 그러므로 두보는 자칭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했다. 증조부는 공현(鞏縣: 지금의 하남성 鞏義)로 이사를 갔다. 두보는 일찍이 장안성 남쪽 소릉(少陵) 부근에 거주한 적이 있다. 그래서 또 자칭 “소릉야로(少陵野老)”라고 하여, “두소릉(杜少陵)”이라고 불렸다. 후에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맡은 적이 있어, 후세에 “두공부(杜工部)”라고 칭해졌다. 두보는 중국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시성(詩聖)”이라고 불리었다. 그의 시는 당시의 정치․군사․사회의 상황을 전면적으로 반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시사(詩史)”라고 했다. 후인들은 그와 이백(李白)을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했다.
편자.
손수(孫洙)
당시삼백수의 편자는 손수(孫洙: 1711-1778)이다. 그는 자가 임서(臨西)이며, 영서(苓西)라고도 한다. 호는 형당(蘅塘), 만호(晩號)는 퇴사(退士)인데, 일반적으로 형당퇴사(蘅塘退士)라고 부른다. 강소성 무석(無錫) 사람이다.
청(淸) 건륭(乾隆) 16년(1751)에 진사(進士)가 되어, 직례대성(直隷大成)․노룡(盧龍), 그리고 산동추평지현(山東鄒平知縣)을 역임했다. 건륭 27년(1762), 산동향시동고관(山東鄕試同考官)에 임용되었고, 후에 강녕부유학교수(江寧府儒學敎授)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집이 가난하여, “한겨울에 독서를 할 때 항상 나무 막대기를 손에 잡고 있었는데, ‘목생화(木生火)’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추위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만년에 고향에 돌아왔다. 저서로 형당만고(蘅塘漫稿) 가 있다. 그의 후처(後妻) 서난영(徐蘭英)은 붓글씨와 시에 뛰어나, 일찍이 황제로부터 ‘강남의 여자 선비[江南女士]’라는 인장(印章)을 받기도 했다. 건륭 28년(1763), 그들 부부는 절차탁마 의견을 교환하여 이 당시삼백수를 편찬하여 가숙(家塾)의 교과서로 만들었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전적으로 당시(唐詩) 가운데 인구에 회자되는 작품을 취하여 그 가운데 더욱 중요한 작품만을 취하였다(專就唐詩中膾炙人口之作, 擇其尤要者)”고 했으며, “아동들로 하여금 그것을 익히게 하고, 노인들로 하여금 또한 폐(廢)하지 않게 했다(俾童而習之, 白首亦莫能廢).”고 했다. 곧 그가 선별한 당시는 뛰어난 작품 중의 뛰어난 작품이며,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모두 합당하고, 아속공상(雅俗共賞)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 역자(譯者) 소개: 조규백(曺圭百)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중문과에서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만대학(臺灣大學) 중문과 방문학인, 중국 복단대학(復旦大學) 중문과 박사후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 중국 사천대학(四川大學) 고적연구소(古籍硏究所) 연구학자, 중국 남경대학(南京大學) 중문과 연구학자를 역임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에서 중국고전을 배웠으며, 제주대, 제주산업정보대학의 강사와 제주관광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 성균관대, 숭실대에서 학부생과 교육대학원의 강의를 맡고 있다.
저역서로 『중국의 문호 소동파』(역주), 『소동파산문선』(역주), 『소동파사선(蘇東坡詞選)』(역주), 『제주관광중국어회화(상하)』(공저), 『史記世家(하)』(공역), 『천자문주해(前) - 아들을 위한 천자문』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蘇軾詩硏究」(박사논문), 「『詩經 ․ 鄭風』 愛情詩 小考」, 「출사와 은퇴 간의 갈등과 그 해소 - 蘇軾詩의 한 단면」, 「陶淵明시에의 동일화 양상과 陶詩의 창조적 수용 - 蘇軾詩의 한 단면」, 「蘇軾詩에 나타난 현실세계와의 괴리와 그 해소」 등 다수가 있다.
이메일 주소: sudongp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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