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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가는길 성정각 보춘정, 희우루, 관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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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각


창덕궁 인정전을 관람하고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 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 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 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인정전에서 바라보는 청기와 지붕이 아름답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魂殿,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글 출처 (창덕궁)
희정당(熙政堂)-熙政 : 화락한 정치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궁궐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이 모습과 완전히 다르고, 원래의 강녕전과도 다르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출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大造 : 큰 공업(功業)을 이룬다 비극적 역사가 담겨 있는 침전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이건 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 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글 출처(창덕궁)
대조전은 현재 공사 중



성정각 영현문

영현문迎賢門 성정각은 세자가 공부하는 곳이다. 그 곳의 남문을 영현문이라 한다. 뜻풀이 : ‘영현(迎賢)’이란 ‘어진이를 맞이한다’는 의미이다. 성정각 일원
Seongjeonggak and Vicinity
현재 후원으로 가는 넓은 길에 큰 건물인 중회당이 있었고, 이 일대가 왕세자의 거치인 동궁이었다.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때 주로 기거하면서 정궁으로 쓰던 곳이기도 했다. 동궁에는 많은 전물들이 있었는데, 육각 누각인 삼삼 와, 그 옆의 칠 분서 그리고 승화루는 부도로 연결되어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성정각은 세자의 공부방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왕가의 내의원으로 쓰였으며, 단충의 몸채에 중층의 날개채가 직각으로 같은 독특한 모습이다. On the wide road leading to the Secret Garden used to stand Junghuidang House one of the largest buildings on the palace. In this area was Donggung, East Palace, residence for the crown prince. When Crown Prince Hyomyeong, the eldest son of King Sunjo, lived here, Donggung served as the main palace. Among the many buildings at Donggung were a hexagonal pavilion, a storeroom for book collections, and a library, all of which were connected by corridors.
Originally the crown prince's study room, Seongjeonggak was used as a royal hospital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글 출처(창덕궁)



성정각(誠正閣)의 부속건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내의원 건물




조화어약調和御藥·보호성궁保護聖躬
현재 성정각 앞 행각에 ‘조화 어약’과 ‘보호성 궁’이란 편액이 나란히 북쪽을 향하여 걸려 있다 뜻풀이 :
‘조화 어약(調和御藥)’은 ‘임금이 드시는 약을 조제한다’는 의미이다. 보호성 궁(保護聖躬)’은 ‘임금의 몸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성(聖)’은 임금을 뜻하며 ‘궁(躬)’은 몸이라는 뜻이다.



누각에는 희우루(喜雨樓), 보춘정(報春亭) 이라는 편액들이 걸려 있다.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觀物軒)은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와 접견을 했던 곳으로, 현재는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남아 있다.





보춘정(報春亭) 희우루와 보춘정은 성정각의 동쪽 누각인데 동쪽이 희우, 남쪽이 보춘이다. 뜻풀이 : ‘보춘(報春)’은 ‘봄이 옮을 알린다’는 의미이다. 봄은 동쪽을 상징하고 성정각이 춘궁(春宮: 왕세자)이 독서를 하는 곳이므로 ‘춘(春)’ 자가 중의적으로 쓰인 듯하다. (출처 창덕궁)




성정각(誠正閣)의 부속건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내의원 건물

보춘정(報春亭) 희우루와 보춘정은 성정각의 동쪽 누각인데 동쪽이 희우, 남쪽이 보춘이다.



보춘정(報春亭)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있는 관물헌(觀物軒)]








희우루(喜雨樓) 희우루와 보춘정은 성정각의 동쪽 누각인데 동쪽이 희우, 남쪽이 보춘이다.
희우루(喜雨樓) 뜻풀이 : ‘희우(喜雨)’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한다’[喜雨]는 뜻이다.


희우루(喜雨樓)


희우루(喜雨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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